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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COMING A CHAIR

JULY.2026 


의자는 단순히 앉기 위한 물체가 아니다. 수많은 사물들이 몸을 지탱할 수 있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모두 의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의자는 언제 의자가 되는가? 이 작업은 그 질문에서 시작한다. 

모듈을 제시하고, 구조를 단순화하고, 기능을 축소하는 과정은 더 미니멀한 의자를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의 오브젝트를 '의자'로 인식하게 만드는 최소한의 조건을 탐구하기 위한 실험이다.

특히 등받이는 단순한 구조적 요소가 아니라, 공간 속에서 '뒤'를 선언하고 몸의 방향을 제안하는 하나의 기호처럼 작동한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흥미롭게도 동일한 박스 구조도 등받이 하나가 더해지는 순간, 사람들은 그것을 더 이상 수납장이나 조각이 아닌 의자로 읽기 시작한다.

즉, 등받이는 의자를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의자로 분류하게 만드는 표지(MARKER)이며, 하나의 사물을 다른 범주로 이동시키는 의미의 라벨처럼 기능한다. 내가 지금 작업중인 이 프로젝트는 의자의 형태를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라, 의자라는 개념이 인식 속에서 어떻게 형성되고, 어떤 순간에 유지되거나 무너지는지를 탐구한다. 결국 이 작업의 관심은 물체 자체보다 물체를 읽는 인간의 인지와 몸의 경험에 있으며, 의자의 본질은 형태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것을 의자로 인식하는 과정 속에서 발생한다는 가설을 제안한다. 

A CHAIR IS MORE THAN AN OBJECT DESIGNED FOR SITTING. COUNTLESS OBJECTS CAN SUPPORT THE BODY, YET WE DO NOT CALL ALL OF THEM CHAIRS. SO WHEN DOES A CHAIR BECOME A CHAIR? THIS PROJECT BEGINS WITH THAT QUESTION.

RATHER THAN PURSUING MINIMALISM FOR ITS OWN SAKE, THE PROCESS OF INTRODUCING MODULES, SIMPLIFYING STRUCTURE, AND REDUCING FUNCTION SERVES AS AN EXPERIMENT TO IDENTIFY THE MINIMUM CONDITIONS UNDER WHICH AN OBJECT IS RECOGNIZED AS A CHAIR.

THROUGH THIS PROCESS, I CAME TO UNDERSTAND THAT THE BACKREST IS NOT MERELY A STRUCTURAL COMPONENT. IT FUNCTIONS AS A SIGN: DECLARING A "BACK," ORIENTING THE BODY, AND SUGGESTING A DIRECTION IN SPACE. WHAT IS PARTICULARLY STRIKING IS THAT THE VERY SAME BOX-LIKE STRUCTURE, ONCE A BACKREST IS ADDED, IS NO LONGER PERCEIVED AS A CABINET OR A SCULPTURE, BUT IS ALMOST IMMEDIATELY RECOGNIZED AS A CHAIR.

IN THIS SENSE, THE BACKREST DOES NOT COMPLETE THE CHAIR; IT ACTS AS A MARKER THAT CLASSIFIES AN OBJECT AS A CHAIR. IT FUNCTIONS LIKE A SEMANTIC LABEL, SHIFTING AN OBJECT FROM ONE CATEGORY TO ANOTHER.

RATHER THAN DESIGNING THE FORM OF A CHAIR, THIS ONGOING PROJECT INVESTIGATES HOW THE CONCEPT OF A CHAIR IS CONSTRUCTED IN PERCEPTION, AND THE MOMENT AT WHICH THAT RECOGNITION EMERGES, PERSISTS, OR BREAKS DOWN. ULTIMATELY, THE WORK IS LESS CONCERNED WITH THE OBJECT ITSELF THAN WITH THE HUMAN PROCESSES OF PERCEPTION AND EMBODIED EXPERIENCE THROUGH WHICH OBJECTS ARE READ. IT PROPOSES THAT THE ESSENCE OF A CHAIR DOES NOT RESIDE IN ITS PHYSICAL FORM, BUT ARISES THROUGH THE ACT OF RECOGNIZING IT AS A CHAIR.


WHY CHAIRS
JUNE.2026

의자는 가장 작은 단위의 건축이다.

나는 그래픽 디자인의 평면적인 언어에서 벗어나 실제 물성과 중력, 몸의 관계를 다루어보고 싶었고, 그 출발점으로 의자를 선택했다. 의자는 단순한 기능적 오브젝트가 아니라, 인간의 몸과 공간, 머무름과 시간의 감각이 직접적으로 교차하는 구조라고 생각한다.

작업은 산업화 이후 표준화된 플라이우드 시트 규격에서 시작된다. 재료의 규격화는 생산 효율을 위한 제한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나는 오히려 주어진 제한된 상황에서 형태를 생성하는 시스템으로 바라보고 싶었다. 하나의 시트는 반복적으로 반으로 나뉘고, 다시 반으로 분할된다. 모든 구조는 이 분할된 모듈 안에서만 이루어지며, 결합 방식은 직각만 허용된다.

이러한 방식은 형태를 자유롭게 조형하기보다, 스스로 설정한 규칙 안에서 형태가 발생하도록 유도한다. 작업은 제한된 조건 속에서 가능한 관계와 균형을 탐색하는 과정에 가깝다. 이 점에서 작업은 솔 르윗의 규칙 기반 접근처럼, 아이디어와 시스템이 형태를 생성하는 구조와 닮아 있다.

동시에 나는 산업 시스템 자체를 거부하기보다는, 그 안에 이미 존재하는 규격과 질서를 새로운 방식으로 전유하는 데 관심이 있다. 정해진 재료와 제한된 결합 방식 안에서도 예상하지 못한 공간감과 긴장감, 몸의 감각이 발생할 수 있다고 믿는다.

결국 이 작업은 최소한의 규칙과 구조를 통해, 기능적 오브젝트를 넘어 몸과 공간의 관계를 다시 인식하게 만드는 하나의 실험에 가깝다. 

A CHAIR IS THE SMALLEST UNIT OF ARCHITECTURE.

I WANTED TO MOVE BEYOND THE FLAT LANGUAGE OF GRAPHIC DESIGN AND ENGAGE WITH MATERIALITY, GRAVITY, AND THE BODY IN PHYSICAL SPACE. A CHAIR BECAME THE POINT OF DEPARTURE. TO ME, A CHAIR IS MORE THAN A FUNCTIONAL OBJECT; IT IS A STRUCTURE WHERE THE HUMAN BODY, SPACE, DWELLING, AND THE EXPERIENCE OF TIME DIRECTLY INTERSECT.

THE WORK BEGINS WITH APPROACHING A STANDARDIZED SIZE OF AN INDUSTRIAL PLYWOOD SHEET. WHILE STANDARDIZATION IS OFTEN UNDERSTOOD AS A CONSTRAINT IMPOSED FOR EFFICIENT PRODUCTION, I APPROACH IT AS A GENERATIVE SYSTEM THROUGH WHICH FORM CAN EMERGE. A SINGLE SHEET IS REPEATEDLY DIVIDED IN HALF, THEN HALVED AGAIN. EVERY COMPONENT IS DERIVED EXCLUSIVELY FROM THESE SUBDIVIDED MODULES, AND EVERY CONNECTION IS CONSTRAINED TO A RIGHT ANGLE.

RATHER THAN FREELY COMPOSING FORM, THIS METHOD ALLOWS FORM TO EMERGE FROM A SELF-IMPOSED SET OF RULES. THE WORK IS LESS ABOUT DESIGNING SHAPES THAN ABOUT EXPLORING THE RELATIONSHIPS AND BALANCES THAT BECOME POSSIBLE WITHIN A LIMITED SYSTEM OF CONSTRAINTS. IN THIS SENSE, IT SHARES AN AFFINITY WITH SOL LEWITT'S RULE-BASED PRACTICE, WHERE IDEAS AND SYSTEMS GENERATE FORM.

AT THE SAME TIME, I AM NOT INTERESTED IN REJECTING THE INDUSTRIAL SYSTEM ITSELF, BUT IN REAPPROPRIATING ITS EXISTING STANDARDS AND LOGIC IN NEW WAYS. I BELIEVE THAT EVEN WITHIN FIXED MATERIALS AND RESTRICTED METHODS OF ASSEMBLY, UNEXPECTED SPATIAL QUALITIES, TENSION, AND EMBODIED EXPERIENCE CAN EMERGE.

ULTIMATELY, THIS PROJECT IS AN EXPERIMENT IN USING A MINIMAL SET OF RULES AND STRUCTURES TO MOVE BEYOND THE FUNCTIONAL OBJECT, INVITING A RENEWED AWARENESS OF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BODY AND SPACE.

THE WEIGHT OF STAYING
JUNE.2026

친구와 나누던 대화 속에서 오래 남는 질문 하나를 발견했다. 친구 역시 나와 같은 유학생이었는데, 그가 살던 자취방의 대부분의 가구는 이케아에서 구매한 것들이었다. 쉽게 접고 펼칠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 조립과 해체가 용이한 침대 프레임, 필요에 따라 빠르게 이동하고 처분할 수 있는 가구들. 생각해보면 이러한 가구들은 좁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기능적 대상인 동시에, 잦은 이사를 경험하고 장기적인 정착보다 일시적인 체류를 전제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설계된 물건들이기도 하다.

친구는 그 공간에 살면서도 그곳을 완전히 자신의 집이라고 느끼지 못했다고 말했다. 오히려 언젠가는 떠나야 할 장소, 잠시 머무는 경유지와 같은 감각이 더 강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우리가 공간을 집으로 인식하는 방식에는 단순히 시간의 축적뿐 아니라 그 공간을 구성하는 물질의 성격 또한 관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임시적 가구들은 공통적인 특성을 가진다. 가볍고, 얇고, 접힐 수 있으며, 쉽게 이동할 수 있다. 그것들은 효율적이고 합리적이지만, 동시에 자신이 영구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스스로 드러낸다. 이러한 가구들은 사용자를 한 장소에 정착시키기보다, 다음 이동을 준비하도록 만든다.

반대로 우리가 어린 시절 살았던 부모님의 집을 떠올려보면, 그 안의 가구들은 다른 종류의 시간을 품고 있었다. 쉽게 옮길 수 없는 커다란 책장, 오랜 세월 가족의 식사를 함께한 무거운 식탁, 몸의 흔적이 축적된 소파와 침대. 이러한 가구들은 기능을 수행하는 사물인 동시에, 한 장소에 머무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것들은 이동을 전제로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공간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가구의 무게와 소재는 단순한 물리적 특성이 아니라 우리가 공간을 인식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하나의 심리적, 철학적 장치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거운 가구는 우리에게 영속성을 암시하고, 가벼운 가구는 잠정성을 암시한다. 나무와 돌, 두꺼운 천과 금속처럼 시간의 흔적을 받아들이는 재료들은 공간에 지속성과 기억을 부여하고, 얇고 가벼운 산업 소재들은 이동성과 효율성을 강조한다.

어쩌면 우리는 공간에 사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이 약속하는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가구는 그 시간의 밀도를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물질적 언어일지도 모른다. 내가 머무르는 공간이 집처럼 느껴지는지, 혹은 잠시 스쳐가는 장소처럼 느껴지는지는 결국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사물들의 무게와, 그 무게가 암시하는 시간의 길이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바슐라르는 집을 기억의 저장소라고 말했다. 우리의 기억은 추상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낡은 식탁의 흠집에 남아 있고, 오래된 소파의 꺼진 쿠션에 남아 있으며, 몇 번의 이사를 견뎌낸 책장의 표면에 축적된다. 반대로 쉽게 조립되고 쉽게 해체되는 가구들은 기억이 머물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I DISCOVERED A QUESTION THAT STAYED WITH ME DURING A CONVERSATION WITH A FRIEND. LIKE ME, HE WAS AN INTERNATIONAL STUDENT. NEARLY ALL OF THE FURNITURE IN HIS APARTMENT CAME FROM IKEA: FOLDING TABLES AND CHAIRS, A BED FRAME DESIGNED FOR EASY ASSEMBLY AND DISASSEMBLY, AND FURNITURE THAT COULD BE QUICKLY MOVED OR DISCARDED AS NEEDED. IN RETROSPECT, THESE OBJECTS WERE NOT ONLY FUNCTIONAL SOLUTIONS FOR MAKING EFFICIENT USE OF A SMALL LIVING SPACE, BUT ALSO PRODUCTS DESIGNED FOR PEOPLE WHO EXPERIENCE FREQUENT RELOCATION AND LIVE WITH THE ASSUMPTION OF TEMPORARY RESIDENCE RATHER THAN PERMANENT SETTLEMENT.

HE TOLD ME THAT, EVEN WHILE LIVING THERE, HE NEVER TRULY FELT THAT THE APARTMENT WAS HIS HOME. INSTEAD, IT FELT LIKE A PLACE HE WOULD EVENTUALLY HAVE TO LEAVE—A WAYSTATION, A TEMPORARY STOP ALONG THE WAY. THAT CONVERSATION LED ME TO WONDER WHETHER OUR PERCEPTION OF HOME IS SHAPED NOT ONLY BY THE PASSAGE OF TIME, BUT ALSO BY THE MATERIAL CHARACTER OF THE OBJECTS THAT MAKE UP A SPACE.

MOST TEMPORARY FURNITURE SHARES A COMMON SET OF QUALITIES. IT IS LIGHTWEIGHT, THIN, FOLDABLE, AND EASY TO MOVE. IT IS EFFICIENT AND PRACTICAL, YET IT ALSO OPENLY REVEALS ITS OWN IMPERMANENCE. RATHER THAN ENCOURAGING ITS USER TO SETTLE IN A PLACE, IT QUIETLY PREPARES THEM FOR THEIR NEXT DEPARTURE.

BY CONTRAST, WHEN I THINK BACK TO MY CHILDHOOD HOME, THE FURNITURE HELD A DIFFERENT KIND OF TIME. A LARGE BOOKCASE TOO HEAVY TO MOVE. A SOLID DINING TABLE THAT HAD WITNESSED YEARS OF FAMILY MEALS. A SOFA AND BED THAT RETAINED THE TRACES OF THE BODIES THAT HAD OCCUPIED THEM. THESE OBJECTS WERE NOT MERELY FUNCTIONAL; THEY WERE EXPRESSIONS OF AN INTENTION TO REMAIN. THEY WERE NOT DESIGNED WITH MOVEMENT IN MIND, BUT SEEMED TO EXIST IN ORDER TO TAKE ROOT WITHIN A PLACE.

THIS LED ME TO THINK THAT THE WEIGHT AND MATERIALITY OF FURNITURE ARE NOT MERELY PHYSICAL ATTRIBUTES, BUT PSYCHOLOGICAL AND PHILOSOPHICAL DEVICES THAT SHAPE THE WAY WE PERCEIVE SPACE. HEAVY FURNITURE SUGGESTS PERMANENCE, WHILE LIGHTWEIGHT FURNITURE SUGGESTS TEMPORARINESS. MATERIALS SUCH AS WOOD, STONE, THICK TEXTILES, AND METAL—MATERIALS THAT ACCEPT THE MARKS OF TIME—LEND A SPACE A SENSE OF DURATION AND MEMORY. LIGHTWEIGHT INDUSTRIAL MATERIALS, BY CONTRAST, EMPHASIZE MOBILITY, FLEXIBILITY, AND EFFICIENCY.

PERHAPS WE DO NOT SIMPLY LIVE IN SPACES; WE LIVE WITHIN THE KIND OF TIME THOSE SPACES PROMISE. FURNITURE MAY BE THE MATERIAL LANGUAGE THAT MOST DIRECTLY REVEALS THE DENSITY OF THAT TIME. WHETHER A PLACE FEELS LIKE HOME OR MERELY A PLACE WE PASS THROUGH MAY DEPEND LESS ON THE ARCHITECTURE ITSELF THAN ON THE WEIGHT OF THE OBJECTS THAT FILL IT—AND ON THE DURATION OF TIME THAT SUCH WEIGHT IMPLIES.

GASTON BACHELARD DESCRIBED THE HOUSE AS A REPOSITORY OF MEMORY. MEMORY DOES NOT EXIST AS AN ABSTRACTION. IT RESIDES IN THE SCRATCHES OF AN OLD DINING TABLE, THE WORN CUSHION OF A SOFA, AND THE SURFACE OF A BOOKCASE THAT HAS SURVIVED COUNTLESS MOVES. FURNITURE DESIGNED TO BE EASILY ASSEMBLED AND QUICKLY DISCARDED, ON THE OTHER HAND, RARELY ALLOWS MEMORY ENOUGH TIME TO TAKE ROOT.


QUESTIONING THE FORM

MAY.2026


디지몬에 열광하던 내 어린 시절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진화, 전투, 성장—이런 것들이 남자아이의 본능이었을까, 아니면 디지몬에 나오는 캐릭터들의 디자인과 컬러에 본능적으로 끌렸던 걸까. 최근 짧은 전투 클립을 다시 보게 되었는데, 그 장면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다가왔다. 두 캐릭터의 전투씬이었는데, 캐릭터의 선악이나 서사를 떠나서 이미 형태가 먼저 위계를 선언하고 있다고 느꼈다.

사족보행의 괴물로 묘사되는 디지몬의 형태는 굉장히 낮게 깔려 있다. 몸은 땅 가까이에 붙어 있고, 움직임은 빠르고 예측하기 어렵다. 마치 숲에서 마주하는 야생동물처럼 위협적이면서 동시에 본능적인 움직임을 보인다. 반대로 이족보행의 디지몬은 몸을 세운다. 시선은 인간처럼 높아지고, 팔의 움직임은 자유로워진다. 자유로워진 몸은 무기를 선택할 수 있게 해주고,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 둘이 마주하는 순간, 싸움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음에도 나는 이미 결과를 알고 있다고 느꼈다.

이 감각은 단순한 연출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우리가 너무 오래 익숙해진 하나의 전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직립한 존재는 더 진화한 존재다”라는 아이디어. 디지몬의 세계관에서는 이 전제가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인간이 직립하기 때문에, 인간과 닮은 형태에 가까울수록 더 완성된 존재처럼 묘사된다. 이 지점에서 나는 미묘한 불편함을 느꼈다. 다른 종류의 불편함이 아니라, 이렇게 세팅된 디자인을 우리가 의심 없이 너무 쉽게 받아들인다는 점이 불편했다.

동시에 다른 일본 애니메이션의 세계관과 디자인이 떠올랐다. 모노노케 히메에 등장하는 시시가미를 처음 마주했던 장면에서 느꼈던 감각이다. 작중의 신은 사슴의 형태를 하고 있다. 인간과 닮은 존재로 묘사되지 않고, 말을 하거나 감정을 표현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는 명백하게 인간 위에 있는 존재로 나타난다. 생과 죽음을 결정하는 위치, 설명되지 않는 권위, 그리고 어떤 의도도 읽히지 않는 고요한 침묵 속에서, 그 존재는 인간을 내려다본다.

디지몬의 세계관과는 반대로, 형태는 사족보행의 동물이지만 존재는 더 높은 위치에 있다. 우리가 디지몬에서 익숙하게 사용해온 기준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순간이다. 인간형이 아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더 높은 위치에 놓인다. 이때 인간 중심적인 기준이 무너질 때 발생하는 감각이, 내가 느꼈던 그 이상하고 낯선 느낌이었다고 생각한다.

두 세계관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한다. 하나는 인간에 가까워지는 것을 진화로 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을 전체 질서의 일부로 낮춘다. 어느 쪽이 옳고 그른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두 세계관을 통해 우리가 어떤 세계를 ‘자연스럽다’고 느끼는지에 대해 질문하고 싶었다.

이 두 세계관을 접하고 난 뒤 남는 질문은 단순하다. 왜 우리는 인간과 닮은 형태를 더 높은 것으로 느끼는가. 그리고 더 나아가, 형태는 정말 존재의 위계를 말해주는가. 

I HAVE A FAINT MEMORY OF BEING ABSOLUTELY FASCINATED BY DIGIMON AS A CHILD. EVOLUTION, BATTLES, GROWTH—WAS THIS SIMPLY THE INSTINCT OF A YOUNG BOY, OR WAS I ALREADY DRAWN, ALMOST INTUITIVELY, TO THE DESIGN, COLOR, AND FORM OF ITS CHARACTERS? RECENTLY, I REWATCHED A SHORT BATTLE SCENE, AND IT FELT COMPLETELY DIFFERENT FROM HOW I HAD REMEMBERED IT. SETTING ASIDE THE STORY OR THE MORAL DISTINCTION BETWEEN THE CHARACTERS, I WAS STRUCK BY THE FEELING THAT THEIR FORMS HAD ALREADY DECLARED A HIERARCHY BEFORE THE FIGHT HAD EVEN BEGUN.

THE DIGIMON PORTRAYED AS QUADRUPEDAL CREATURES REMAIN CLOSE TO THE GROUND. THEIR BODIES HUG THE EARTH, AND THEIR MOVEMENTS ARE FAST, INSTINCTIVE, AND DIFFICULT TO PREDICT. THEY FEEL LIKE WILD ANIMALS ENCOUNTERED IN A FOREST—THREATENING, YET ENTIRELY DRIVEN BY INSTINCT. THEIR BIPEDAL COUNTERPARTS, ON THE OTHER HAND, STAND UPRIGHT. THEIR GAZE RISES TO A HUMAN HEIGHT, THEIR ARMS BECOME FREE TO ACT, TO WIELD WEAPONS, AND TO EXERCISE CONTROL. THE MOMENT THESE TWO FIGURES FACE EACH OTHER, I FEEL AS THOUGH I ALREADY KNOW THE OUTCOME, EVEN BEFORE THE BATTLE BEGINS.

IT SEEMED CLEAR TO ME THAT THIS RESPONSE WAS NOT MERELY THE RESULT OF CINEMATIC STAGING. IT EMERGED FROM AN ASSUMPTION SO DEEPLY EMBEDDED THAT IT HAS BECOME ALMOST INVISIBLE: THE IDEA THAT AN UPRIGHT BEING IS A MORE EVOLVED BEING. WITHIN THE WORLD OF DIGIMON, THIS ASSUMPTION IS TREATED AS ENTIRELY NATURAL. BECAUSE HUMANS STAND UPRIGHT, THE CLOSER A CREATURE RESEMBLES A HUMAN, THE MORE COMPLETE, ADVANCED, OR POWERFUL IT APPEARS. THIS IS THE POINT AT WHICH I BEGAN TO FEEL A SUBTLE DISCOMFORT. NOT BECAUSE OF THE DESIGN ITSELF, BUT BECAUSE OF HOW EASILY WE ACCEPT THIS VISUAL HIERARCHY WITHOUT QUESTION.

AT THE SAME TIME, I THOUGHT OF A VERY DIFFERENT WORLD—THE FOREST SPIRIT IN PRINCESS MONONOKE. MY FIRST ENCOUNTER WITH THAT BEING LEFT A COMPLETELY DIFFERENT IMPRESSION. THE GOD OF THE FOREST TAKES THE FORM OF A DEER. IT IS NOT HUMAN-LIKE. IT DOES NOT SPEAK. IT DOES NOT EXPRESS EMOTION. AND YET ITS PRESENCE IS UNMISTAKABLY SUPERIOR TO THAT OF HUMANITY. IT EXISTS IN A POSITION FROM WHICH IT DETERMINES LIFE AND DEATH. ITS AUTHORITY IS NEVER EXPLAINED, ITS INTENTIONS REMAIN UNREADABLE, AND WITHIN ITS SILENCE IT GAZES UPON HUMANITY FROM A HIGHER ORDER OF EXISTENCE.

HERE, THE LOGIC OF DIGIMON IS COMPLETELY REVERSED. THE FORM IS THAT OF A QUADRUPEDAL ANIMAL, YET ITS EXISTENCE OCCUPIES A HIGHER POSITION THAN ANY HUMAN. THE CRITERIA THAT FELT SO NATURAL IN DIGIMON NO LONGER APPLY. BECAUSE THE FOREST SPIRIT IS NOT HUMAN-LIKE, IT CANNOT BE FULLY UNDERSTOOD. AND PERHAPS IT IS PRECISELY BECAUSE IT RESISTS HUMAN UNDERSTANDING THAT IT IS PERCEIVED AS GREATER THAN HUMANITY. THE STRANGE SENSATION I FELT CAME FROM THE MOMENT WHEN MY USUAL, HUMAN-CENTERED FRAMEWORK COLLAPSED.

THESE TWO WORLDS MOVE IN OPPOSITE DIRECTIONS. ONE TREATS BECOMING MORE HUMAN AS A FORM OF EVOLUTION. THE OTHER PLACES HUMANITY BACK INTO A LARGER ORDER OF EXISTENCE, REFUSING TO GRANT IT THE HIGHEST POSITION. MY INTEREST IS NOT IN DETERMINING WHICH WORLDVIEW IS CORRECT, BUT IN ASKING WHY ONE FEELS SO NATURAL TO US WHILE THE OTHER FEELS STRANGE.

AFTER ENCOUNTERING THESE TWO WORLDS, I AM LEFT WITH A SIMPLE QUESTION: WHY DO WE INSTINCTIVELY ASSOCIATE HUMAN-LIKE FORM WITH A HIGHER ORDER OF BEING? AND MORE FUNDAMENTALLY, CAN FORM REALLY TELL US ANYTHING ABOUT THE HIERARCHY OF EXISTENCE?


BEING AN ARTIST

APR.2026

아티스트는 “무언가를 잘 만드는 사람”이라기보 자신이 세상을 어떤 방식으로 감지하는지를 끝까지 밀어붙여서 그 감지를 남기는 사람에 가깝다 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흔히 작품을 ‘표현’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작품은 표현 이전의 층위—지각과 선택의 방식—을 드러내는 장치에 가깝다. 누군가는 형태를 통해, 누군가는 소리를 통해, 또 다른 누군가는 구조나 시간의 흐름을 통해 자신을 남긴다. 회화, 음악, 영상, 조각, 가구 같은 매체는 그저 결과적으로 보이는 형식일 뿐, 실제로는 각자가 가장 덜 번역되고 가장 직접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감각의 통로다. 

어떤 사람은 빛이 떨어지는 각도에서 멈춰 서고, 어떤 사람은 반복되는 리듬에서 감정을 읽어낸다. 또 어떤 사람은 사물의 구조나 균형에서 세계를 이해한다. 이 차이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감각의 방향성에 가깝다. 그리고 아티스트는 그 방향성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이다. 오히려 그 감각이 향하는 곳을 집요하게 따라가며, 그것을 형태로 고정시키려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지금 중요한 질문은 하나로 좁혀진다. “나는 무엇에 예민한가?”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 말하자면, 어떤 형태를 멈춰서 오래 보게 되는지, 어떤 비율이 ‘맞다’ 라고 느끼게 되는지, 어떤 구조에 끌리는지, 어떤 재료 나 물성에 몸과 마음이 반응하지는지.

그래서 결국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만들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에 예민한가이다. 어떤 형태에서 시선이 오래 머무는지, 어떤 재료를 만질 때 생각이 또렷해지는지, 어떤 구조에서 비로소 ‘맞다’는 감각이 드는지. 이 질문에 솔직해질수록, 선택은 줄어들고 방향은 선명해진다.

아마도 사람들이 어떤 아티스트를 인식하게 되는 순간은, 그 사람이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했을 때가 아니라, 그 사람이 특정한 방식으로밖에 세계를 볼 수 없다는 확신이 생길 때다. 그 고유한 시선이 반복되고 축적되면서, 작품은 더 이상 개별적인 결과물이 아니라 하나의 일관된 시각 체계로 읽히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작품은 기록을 넘어 하나의 언어가 된다. 

I HAVE COME TO THINK THAT AN ARTIST IS NOT SIMPLY SOMEONE WHO IS A CRAFTSPERSON, BUT SOMEONE WHO PUSHES THEIR WAY OF PERCEIVING THE WORLD TO ITS FURTHEST LIMITS AND LEAVES A TRACE OF THAT PERCEPTION BEHIND THAT RESONATES.

WE OFTEN DESCRIBE ART AS A FORM OF EXPRESSION. MORE PRECISELY, HOWEVER, A WORK OF ART REVEALS SOMETHING THAT PRECEDES EXPRESSION—A WAY OF PERCEIVING, SELECTING, AND ATTENDING TO THE WORLD. SOME ARTISTS WORK THROUGH FORM, OTHERS THROUGH SOUND, WHILE OTHERS THINK THROUGH STRUCTURE OR THE PASSAGE OF TIME. PAINTING, MUSIC, FILM, SCULPTURE, OR FURNITURE ARE MERELY THE MEDIUMS IN WHICH THESE PERCEPTIONS BECOME VISIBLE. THEY ARE NOT THE SOURCE OF THE WORK, BUT THE CHANNEL THROUGH WHICH EACH ARTIST CAN RESPOND TO THE WORLD WITH THE LEAST TRANSLATION BETWEEN PERCEPTION AND FORM.

SOME PEOPLE PAUSE AT THE WAY LIGHT FALLS ACROSS A SURFACE. OTHERS FIND THEMSELVES MOVED BY A REPEATED RHYTHM. SOME UNDERSTAND THE WORLD THROUGH THE STRUCTURE OF OBJECTS OR THE BALANCE OF FORMS. THESE DIFFERENCES ARE NOT SIMPLY MATTERS OF TASTE; THEY ARE DIFFERENCES IN THE DIRECTION OF PERCEPTION. AN ARTIST IS SOMEONE WHO REFUSES TO LOOK AWAY FROM THAT DIRECTION. INSTEAD, THEY FOLLOW IT WITH PERSISTENCE, TRYING TO GIVE IT A STABLE FORM.

THIS REDUCES THE IMPORTANT QUESTION TO SOMETHING REMARKABLY SIMPLE: WHAT AM I SENSITIVE TO? MORE SPECIFICALLY, WHAT FORMS MAKE ME STOP AND LOOK A LITTLE LONGER? WHAT PROPORTIONS FEEL INEVITABLY RIGHT? WHAT STRUCTURES CONTINUE TO HOLD MY ATTENTION? WHAT MATERIALS OR PHYSICAL QUALITIES ELICIT A RESPONSE FROM BOTH MY BODY AND MY MIND?

ULTIMATELY, THE CENTRAL QUESTION IS NOT WHAT I SHOULD MAKE, BUT WHAT I AM UNIQUELY SENSITIVE TO. WHICH FORMS HOLD MY GAZE? WHICH MATERIALS SHARPEN MY THINKING THE MOMENT I TOUCH THEM? WHICH STRUCTURES PRODUCE THAT QUIET SENSE OF CERTAINTY THAT SOMETHING IS EXACTLY AS IT SHOULD BE? THE MORE HONESTLY I CAN ANSWER THESE QUESTIONS, THE FEWER MY CHOICES BECOME, AND THE CLEARER MY DIRECTION EMERGES.

PERHAPS THE MOMENT PEOPLE BEGIN TO RECOGNIZE SOMEONE AS AN ARTIST IS NOT WHEN THEY PRESENT AN INTERESTING IDEA, BUT WHEN IT BECOMES EVIDENT THAT THEY CANNOT HELP SEEING THE WORLD IN A PARTICULAR WAY. AS THAT DISTINCT WAY OF SEEING IS REPEATED AND ACCUMULATED OVER TIME, INDIVIDUAL WORKS CEASE TO BE ISOLATED OBJECTS AND BEGIN TO FORM A COHERENT VISUAL AND CONCEPTUAL SYSTEM.

ONLY THEN DOES THE WORK BECOME MORE THAN A RECORD OF THOUGHT. IT BECOMES A LANGUAGE.

WOOD FROM ELSEWHERE

MAR.2026 

우리는 금, 다이아몬드 같은 광물들을 특별하다고 여긴다. 항상 커다란 금맥이나 다이아몬드가 발견되면 그걸 다루는 기사들을 접해왔고, 그 광물들은 특별한 주얼리 디자인의 소재가 되었으며, 영화, 광고, 드라마를 통해 우리는 어떤 사회적으로 학습해왔다. 그래서 우리는 그 소재들이 특별하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우리가 귀하다고 믿는 기준이 사실 얼마나 국지적인지, 지구라는 아주 얇은 조건 위에서만 성립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있었다.

금은 초신성 폭발이나 중성자별 충돌 같은 극단적인 우주 사건을 통해 만들어진다. 지구에서는 희귀한 광물이지만, 우주 전체로 시야를 넓혀보면 특정 조건에서 반복적으로 생성되는 원소일 뿐이다. 다이아몬드도 마찬가지다. 탄소가 풍부한 외계 행성, 심지어 별의 잔해가 거대한 다이아몬드 구조일 가능성도 제기되어 왔다. 결국 광물은 물질과 외부 조건만 맞으면 어디서든 만들어질 수 있는 사건의 분산물일 뿐이며, 생명과 같이 복잡한 조건을 요구하지 않는다.

반대로 나무는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다. 길 위의 가로수들부터 공원에도 있고, 산에 가보면 나무로 빽빽해서 우리는 거의 나무라는 존재를 의식하지 않고 살아간다. 하지만 나무는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복잡한 생명 시스템이다. 현재까지의 과학적 사실로는 지구 외에서 나무가 발견된 사례는 없다. 나무가 존재하려면 액체 상태의 물, 안정적인 온도, 대기, 광합성 가능한 별, 그리고 수십억 년에 걸친 진화 과정이 필요하다. 나무는 오히려 앞서 언급한 여러 조건의 집합과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물리적 시간, 그리고 진화가 만들어낸 복잡한 결과물이다.

새로운 시각으로 나무라는 소재로 된 가구를 다시 보면, 메탈이나 플라스틱에는 없는 축적된 시간이 느껴지고, 이미 죽었다고 생각한 물질이지만 살아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나무 소재의 가구나 인테리어를 보면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무가 소재인 가구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한때 살아 있었던 존재의 일부이며 시간이 압축된 형태로 눈앞에 드러난 것이다. 

WE TEND TO REGARD GOLD AND DIAMONDS AS EXTRAORDINARY MATERIALS. WHENEVER A MAJOR GOLD VEIN OR DIAMOND DEPOSIT IS DISCOVERED, IT BECOMES NEWS. THESE MINERALS HAVE LONG BEEN ASSOCIATED WITH LUXURY JEWELRY, AND THROUGH FILMS, ADVERTISING, AND POPULAR CULTURE, WE HAVE BEEN CONDITIONED TO SEE THEM AS SYMBOLS OF RARITY AND VALUE. OVER TIME, WE HAVE COME TO BELIEVE THAT THESE MATERIALS ARE INHERENTLY SPECIAL.

BUT THERE WAS A MOMENT WHEN I REALIZED JUST HOW LOCAL THIS STANDARD OF VALUE REALLY IS—A BELIEF THAT EXISTS ONLY WITHIN THE THIN CONDITIONS OF LIFE ON EARTH.

GOLD IS FORGED THROUGH EXTREME COSMIC EVENTS SUCH AS SUPERNOVA EXPLOSIONS AND NEUTRON STAR COLLISIONS. IT IS RARE ON EARTH, YET FROM THE PERSPECTIVE OF THE UNIVERSE IT IS SIMPLY AN ELEMENT PRODUCED REPEATEDLY UNDER CERTAIN CONDITIONS. THE SAME IS TRUE OF DIAMONDS. CARBON-RICH EXOPLANETS MAY CONTAIN ENORMOUS DIAMOND DEPOSITS, AND SOME STELLAR REMNANTS HAVE EVEN BEEN HYPOTHESIZED TO CONSIST LARGELY OF CRYSTALLIZED DIAMOND. IN THIS SENSE, MINERALS ARE NOT UNIQUE MIRACLES, BUT THE DISTRIBUTED PRODUCTS OF PHYSICAL CONDITIONS. GIVEN THE RIGHT MATERIALS AND ENVIRONMENT, THEY CAN FORM ANYWHERE. THEY DO NOT REQUIRE THE EXTRAORDINARY COMPLEXITY THAT LIFE DOES.

TREES, BY CONTRAST, ARE SO FAMILIAR THAT WE RARELY NOTICE THEM. THEY LINE OUR STREETS, FILL OUR PARKS, AND COVER OUR MOUNTAINS TO SUCH AN EXTENT THAT THEY ALMOST DISAPPEAR FROM CONSCIOUSNESS. YET A TREE IS NOT SIMPLY A MATERIAL; IT IS AN IMMENSELY COMPLEX LIVING SYSTEM. TO DATE, THERE IS NO SCIENTIFIC EVIDENCE OF TREES EXISTING ANYWHERE BEYOND EARTH. FOR A TREE TO EXIST REQUIRES LIQUID WATER, A STABLE ATMOSPHERE, MODERATE TEMPERATURES, A STAR CAPABLE OF SUSTAINING PHOTOSYNTHESIS, BILLIONS OF YEARS OF EVOLUTION, AND THE COUNTLESS CONTINGENCIES THAT MAKE COMPLEX LIFE POSSIBLE. A TREE IS NOT MERELY A THING. IT IS THE PRODUCT OF AN ALMOST UNIMAGINABLE CONVERGENCE OF PHYSICAL CONDITIONS, DEEP TIME, AND EVOLUTIONARY HISTORY.

WHEN I LOOK AT WOOD AS A MATERIAL FROM THIS PERSPECTIVE, IT BEGINS TO FEEL ENTIRELY DIFFERENT. UNLIKE METAL OR PLASTIC, WOOD CARRIES A SENSE OF ACCUMULATED TIME. ALTHOUGH THE TREE IS NO LONGER ALIVE, THE MATERIAL STILL BEARS THE TRACES OF A LIVING ORGANISM—ITS GROWTH RINGS, ITS FIBERS, ITS HISTORY. PERHAPS THIS IS WHY WOODEN FURNITURE AND INTERIORS SO OFTEN FEEL WARMER AND MORE COMFORTING THAN THOSE MADE FROM SYNTHETIC OR INDUSTRIAL MATERIALS. THEY ARE NOT MERELY OBJECTS. THEY ARE FRAGMENTS OF SOMETHING THAT WAS ONCE ALIVE, MATERIALS IN WHICH TIME ITSELF HAS BEEN COMPRESSED INTO A PHYSICAL FORM.


LE CORBUSIER
JAN.2026

우에노 공원 역을 나오면, 회색빛의 두 건물이 서로를 마주보며 서 있다. 왼편에는 마에카와 쿠니오의 도쿄문화회관이, 오른편에는 르 코르뷔지에의 국립서양미술관이 자리한다. 두 건물은 같은 언어를 쓰지만 같은 태도를 취하지는 않는다. 하나는 도시를 향해 열리고, 다른 하나는 중심을 안쪽으로 끌어당긴다.

건축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르 코르뷔지에라는 이름은 점점 설명이 아닌 배경처럼 따라온다. 오늘날 대도시의 구조와 리듬은, 이미 그의 생각이 스며든 상태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동아시아에서 그의 건축을 직접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도쿄다.

미술관 쪽으로 몸을 옮기면, 필로티 아래 형성된 어둠이 진입을 잠시 지연시킨다. 관람자는 자연스럽게 속도를 늦춘 채 건물 안으로 스며든다. 이곳의 건축은 처음부터 자신을 보여주기보다, 서서히 몸에 익숙해지는 장치처럼 작동한다.

전시 공간에 들어서면, 공간은 하나의 완결된 형태라기보다 중심을 감싸며 펼쳐지는 순환형 동선의 집합으로 인식된다. 처음 마주하는 램프를 따라 위로 오를수록 시야는 점차 열리고, 빛은 직접적으로 쏟아지기보다 공간 전체에 고르게 퍼진다. 동선은 목적지를 향하기보다 경험을 축적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노출된 콘크리트의 질감은 차갑기보다, 세로로 남은 결이 나무를 연상시킨다. 구조는 숨겨지지 않은 채 드러나 있지만, 그 존재를 과시하지 않는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이 미술관이 후대의 확장을 전제로 한, 고정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완성된 결과물로 자신을 선언하기보다, 건축이 어떻게 성장하고 반복되며 사용될 수 있는지를 열린 시스템으로 제시한다.

그래서 이 미술관은 한 시대를 대표하는 조형물이라기보다, 시간이 축적되는 그릇에 가깝다. 

STEPPING OUT OF UENO STATION, TOKYO, TWO GREY BUILDINGS STAND ACROSS FROM ONE ANOTHER. TO THE LEFT IS KUNIO MAEKAWA'S TOKYO BUNKA KAIKAN. TO THE RIGHT IS LE CORBUSIER'S NATIONAL MUSEUM OF WESTERN ART. THEY SPEAK THE SAME ARCHITECTURAL LANGUAGE, YET THEY TAKE DIFFERENT POSITIONS. ONE OPENS ITSELF TOWARD THE CITY, WHILE THE OTHER DRAWS ITS CENTER INWARD.

SINCE DEVELOPING AN INTEREST IN ARCHITECTURE, THE NAME LE CORBUSIER HAS GRADUALLY BECOME LESS AN EXPLANATION THAN A CONSTANT BACKGROUND PRESENCE. THE STRUCTURE AND RHYTHM OF THE MODERN CITY ALREADY CARRY HIS IDEAS WITHIN THEM. IN EAST ASIA, TOKYO REMAINS THE ONLY PLACE WHERE ONE CAN EXPERIENCE HIS ARCHITECTURE IN PERSON.

AS I APPROACH THE MUSEUM, THE SHADOW FORMED BENEATH THE PILOTIS DELAYS MY ENTRY FOR A MOMENT. WITHOUT THINKING, I SLOW MY PACE AND GRADUALLY DRIFT INTO THE BUILDING. THE ARCHITECTURE DOES NOT IMMEDIATELY PRESENT ITSELF. INSTEAD, IT OPERATES LIKE SOMETHING THAT QUIETLY SETTLES INTO THE BODY OVER TIME.

ONCE INSIDE, THE SPACE IS PERCEIVED LESS AS A SINGLE, COMPLETE FORM THAN AS A CONTINUOUS CIRCULATION ORGANIZED AROUND A CENTRAL VOID. ASCENDING THE INITIAL RAMP, THE FIELD OF VISION SLOWLY EXPANDS. LIGHT DOES NOT POUR IN DRAMATICALLY, BUT IS EVENLY DIFFUSED THROUGHOUT THE SPACE. THE CIRCULATION IS DESIGNED NOT TO LEAD TOWARD A DESTINATION, BUT TO ACCUMULATE EXPERIENCE.

THE EXPOSED CONCRETE FEELS LESS COLD THAN EXPECTED. ITS VERTICAL GRAIN STILL BEARS THE MEMORY OF THE TIMBER FORMWORK THAT SHAPED IT. THE STRUCTURE REMAINS FULLY VISIBLE, YET NEVER INSISTS UPON ITSELF. EQUALLY FASCINATING IS THE FACT THAT THE MUSEUM WAS CONCEIVED AS AN OPEN SYSTEM—A BUILDING DESIGNED TO ACCOMMODATE FUTURE EXPANSION RATHER THAN EXIST AS A FIXED, FINISHED OBJECT. INSTEAD OF DECLARING ITSELF COMPLETE, IT DEMONSTRATES HOW ARCHITECTURE CAN CONTINUE TO GROW, ADAPT, AND BE REINHABITED OVER TIME.

FOR THIS REASON, THE MUSEUM FEELS LESS LIKE A MONUMENT THAT REPRESENTS A PARTICULAR ERA THAN A VESSEL CAPABLE OF ACCUMULATING TIME.

KOREAN ABSTRACTION

JAN.2026 

추상화는 형상이 사라진 자리에서 국적과 문화, 상징성은 무의미해지고, 오직 색과 형태, 리듬만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러한 추상 작품들을 마주할 때, 흥미롭게도 별다른 설명이 없어도 어떤 작업은 직관적으로 ‘서구적’이라 느껴지고, 또 어떤 작업은 분명하게 ‘한국적’이라는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이 감각은 우리가 학습해온 문화적·미술사적 코드에서 비롯된 선입견일까, 아니면 작품 내부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서로 다른 사고 체계의 흔적일까. 아니면 작품 그 자체 안에, 서로 다른 사고 방식이 이미 새겨져 있기 때문일까.

재료에 대한 태도부터 차이가 드러난다. 서구 추상 미술에서 재료는 작가의 의도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다. 캔버스는 중립적인 평면으로 전제되고, 물감은 작가의 결정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몬드리안의 격자, 프랭크 스텔라의 반복되는 패턴, 엘스워스 켈리의 색면은 자로 잰 듯 정확하며, 재료는 그 자체로 어떤 주장도 하지 않는다. 붓질의 흔적이나 우연, 오차는 제거되고, 작품은 명확하게 고정된 결과의 상태를 제시한다.

반면 동양의 추상 미술에서 재료는 종종 저항하는 존재로 인식된다. 한지, 먹, 흙, 천과 같은 재료들은 작가가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을 전제한다. 물은 스며들고, 표면에는 시간의 흔적이 자연스럽게 축적된다. 이때 작가는 형태를 의도대로 완성하는 ‘만드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재료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변화를 수용하고 허용하는 존재에 가깝다. 이러한 재료 선택에서 비롯되는 차이는 단순한 취향이나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세계를 얼마나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가에 대한 서로 다른 전제에서 출발한다.

형태와 구성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서구 추상은 형태를 통해 정답을 제시한다. 작가가 특정 구성, 비율, 상태를 제시하고 그걸 완성된 형태라고 말한다. 반대로 한국의 단색화 계열의 추상은 형태는 결론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흐름의 흔적이라고 말한다. 박서보의 추상에서 격자와 형태가 등장하더라도, 그것은 질서 자체를 보여준다기 보다 몸이 지속적인 행위를 이어갈 수 있도록 만든 수행의 틀에 가깝다. 이러한 태도는 단색화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강소, 이응노와 같은 한국의 추상 작가들의 작업에서도 형태는 결론으로 제시되기보다 행위와 시간, 사건이 지나간 흔적으로 남는다. 이들에게 추상이란 완결된 구조를 제시하는 언어가 아니라, 세계와 몸이 만난 과정이 잠시 응고된 상태에 가깝다.

여백의 쓰임도 다른데 서구 미술에서의 빈 공간은 대체로 기능이 있다. 구성을 돋보이게 하거나, 긴장을 조절하거나, 아직 채워지지 않은 영역으로 인식되는데 의미는 그려진 곳에서 발생하고, 비어있는 곳은 그 의미를 보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반대로 동양 미술에서 산수화의 중심이 비어 있는 이유는 그 공간이 의미가 없어서 그런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많은것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여백은 남겨진 곳이고 침묵이자 호흡하는 공간이다. 그 빈 공간은 관람자가 들어올 수 있는 여백의 공간이다.

이 차이는 그림을 그릴때 전제된 공간 인식의 차이이며, 공간이 ‘채워야 할 대상’ 인지, ‘이미 자연속에 존재하는 공간’ 인지에 대한 서양과 동양의 세계관 차이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국적’이라고 느껴지는 추상 작업들에서는 불교적 시간관이 깊게 스며들어 있다. 끊임 없는 행위의 반복, 시간의 축적, 그리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과정들. 작품은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보다는 그 자체로 지속되는 상태이다. 작품의 완성은 어딘가에 도달한 상태가 아니라 언제 멈출지에 대한 선택이다.

불교적 사고에서 세계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세상 모든 것은 관계 속에서 잠시 드러났다 사라지며 변화하는 과정이다. 중요한것은 결과로서의 완결이 아닌, 어떻게 행하고 머무는가에 대한 태도이다. 그래서 불교적 사고를 지닌 한국의 추상 작업들은 미술의 의미를 결론이 아닌 미완의 상태를 통해 관람자가 경험하고 호흡할 수 있는 자리를 남긴다.



THOSE WHO BOARDED
JAN.2026


젊은 작가들이 탄 항해선이 끝없는 바다를 건너고 있다. 그들은 모두 같은 출발선에 서 있었지만, 목적지는 서로 다르다.

누군가는 성공을 꿈꾸고, 누군가는 탈출을 원하며, 누군가는 단지 이 배에 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안도한다.

어느 날, 하늘 위를 떠다니는 해적선이 항해선에 접근한다. 해적선은 위협적인 외형을 하고 있지만, 자신들을 “도움을 주러 온 사람들”이라고 소개한다. 그들은 이 배에 탔던 과거의 작가들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떤 이들은 그들과 함께 떠나 막대한 부와 명성을 얻었고 어떤 이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이미 도시 전설처럼 퍼져 있다.

항해선 안에서는 혼란이 시작된다. 해적선은 악이라고 믿는 사람들, 위험해 보이지만 사실은 구원일지도 모른다고 믿는 사람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상황을 관찰하는 사람들로 나뉜다.

증거는 없다. 오직 서사와 설득, 그리고 각자의 욕망만이 존재한다.

주인공은 해적선이 말하는 “도움”에 점점 설득된다. 그들의 논리는 정교하고, 과거의 성공 사례는 매혹적이다.

그러나 배 안에서 만난 한 친구는 조용히 다른 이야기를 건넨다. 해적선은 늘 선한 얼굴로 접근했고, 그럴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사라졌다고.

둘은 같은 정보를 보고,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누구도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
문제는 진실이 증명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배 안의 분열은 점점 격해지고, 사람들은 더 이상 “무엇이 진실인가”를 묻지 않는다. 대신 “누구 편에 설 것인가”를 묻기 시작한다.

마침내 해적선이 마지막 선택을 요구한다.
지금 떠나면 인생이 바뀔 수 있다고,
남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주인공은 결정하지 못한 채
하늘과 바다 사이에 멈춰 선다.

그 순간, 이야기는 끝난다.

AFTER THE SYMBOL

DEC.2025 

많은 사람들은 도시를 여행할 때, 도시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유명한 랜드마크들을 둘러보고 그곳에서, 혹은 그 앞에서 사진을 남긴다. 나는 그런 모습을 자주 관찰했다. 그 사람들에게 도시는 사회적으로 합의된 상징들의 집합을 둘러보는 것이고, 그리고 그 여행의 목적은 그 도시에 도착했음을 확인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꽤나 안전한 선택이고, 어떻게 보면 명확하고 실패하지 않는 선택이다. 다시 본인이 사는 곳으로 돌아가서도, “나는 그 도시를 다녀왔다”라고 자신 있게 주변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도시라는 것은 하나의 사유 시스템에 가깝다. 그 도시는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어떤 사람들과 시간들이 쌓여 있는지, 어떤 사고방식 위에서 지어진 도시인지 알아보는 것이 내 관심사이다.

그 도시에 어떤 미술관들이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는지, 어떤 건축가들이 어떤 재료와 사고방식으로 건축을 남겼는지가 더 궁금했다. 나는 이런 여행을 ‘질문을 이동시키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모두 자기 안에 여러 가지 질문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말로 꺼내지 않아도 몸과 감각 속에 깊이 자리 잡은 질문들. 어떤 공간에서 편안함을 느끼는지, 도시 속 어떤 질서와 흐름을 좋아하는지, 사람마다 다른 질문들이 있을 것이다.

나에게 여행이라는 것은 그 질문들을 다른 공간 속에 올려놓는 일이다. 다른 공기, 다른 밀도, 다른 사회 속에. 그때는 같은 질문이 다른 표정으로 돌아온다.

누군가는 여행 후에 어디를 갔는지를 이야기하고, 누군가는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이야기한다. 낯선 장소와 도시에 도착하는 여행이 있고, 질문들을 이동시키는 여행이 있다.

하지만 솔직해지자면, 이런 태도는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것은 아니다. 가령 뉴욕 여행이 처음이고, 4박 5일 정도의 시간이 내게 있다면, 나 역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보고, 센트럴 파크를 걷고, 자유의 여신상을 향해 배를 탔을 것이다.

우리는 도시를 여행하기 전에 이미 그 도시를 수없이 보면서 지내왔다. 영화 속 타임스퀘어, 드라마 속 센트럴 파크, 그리고 뉴스 속 월스트리트. 그래서 여행은 종종 처음 가는 장소에 나를 떨어뜨리는 과감함보다는, 내가 본 이미지를 실제로 확인하는 일이 되곤 한다. 이 확인은 도시를 이해하기 전, 먼저 몸을 안심시키는 의식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그다음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 확인에서 여행이 끝나고, 어떤 사람들은 그 확인 이후에 질문이 시작된다. 랜드마크를 확인한 뒤에도 이상하게 기억 속에 남는 것이 그 건물이 아니라 그 건물 옆의 작은 골목들이었을 때, 그리고 사람들로 가득한 도심 속보다 처음 가본 갤러리의 계단에서 내 호흡이 더 고르게 느껴졌을 때.

그때부터 도시는 상징이 아니라 사유의 조건이 된다.

AESTHETICS
DEC.2025

요즘 나는 ‘미학’ 아이디어에 다시 끌리고 있다.

돌이켜보면 대학 시절의 나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미 분명한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좋아하는 디자이너들이 있었고, 반복해서 참고하는 스타일 역시 명확했다. HELVETICA, SWISS MODERNISM, MODULAR GRIDS, PRIMARY COLORS, ICONOGRAPHY — 지금 생각해보면 그 몇 가지 키워드로 내 세계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시 나는 왜 그런 디자인 언어들에 반응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만 내가 만드는 작업물들은 언제나 그 AESTHETIC을 향하고 있었고, 그 방향성은 보는 사람에게도 명확하게 읽혔다. 한 교수가 내 작업을 보며 “VERY SWISS”라고 이야기하는 순간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제는 내 취향과 방향성이 더 뚜렷해진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나는 다른 디자인 스타일을 할 수 없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늘 정제된 시각 언어 위에서 작업한다. 그 위에 나만의 규칙을 만들고, 때로는 그 규칙을 미세하게 어긋나게 배치하며 긴장감을 만든다. 하지만 멀리서 보면 여전히 명확한 질서가 있고, 색이나 형태의 작은 조정만으로 변주를 주는 방식에 가깝다.

그래서일까, 지난 작업들을 찬찬히 돌아보면 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한 가지 DNA가 분명히 존재한다. 결국 내가 만드는 시각 언어는 비슷한 결로 흘러가고 있다.

학교에서는 미쳐 깊이있게 생각할 틈이 없었던 거 같은데, 지금에 와서 나는 미학을 생각해보고 있다.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기부터해서 지금까지 흐르고 있던 그 통일된 언어는 어떤 것에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그리고 지금의 나는 작업물들의 흐름을 보면서 ‘나는 왜 이런 세계에 반응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요즘 이어지고 있다.

BRANDS, COLORS, AND CITIES
DEC. 2025

도시마다 고유한 색과 팔레트가 존재한다는 걸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서울과 뉴욕을 지나 LA에 정착해 살아보면서야 비로소, 그 사실을 진짜로 느낄 수 있었다.

빛의 온도, 공기의 습도, 사람들이 걷는 속도, 건물들의 재료에서 질감과 색이 도시의 고유한 팔래트를 만들어낸다는걸 요즘 더욱 느끼고 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그 색은 결국 그 도시에 태어난 브랜드의 태도와 닮아 있다는걸 피부로 느끼고 있다.

뉴욕은 차가운 철근 콘크리트와 붉은 벽돌색이 맞부딪치는 격렬한 도시이다. 빠르고 정확한 뉴요커들의 걸음, 대비가 강한 건물들의 그림자, 차가운 공기는 뉴욕 태생의 브랜드들의 정체성과도 닮아 있다. Supreme의 거칠고 반항적인 에너지, Thom Browne의 군더더기 없는 실루엣과 레이어링에서 보여지는 회색빛은 뉴욕의 차가움과 긴장을 정확히 담아내고 있다.

서울은 차가운 화이트의 도시이다. LED 조명의 선명함과 찬 기운, 수직으로 올라간 콘크리트 아파트 단지들, 높은 유리 건물들에서 반사되는 날카로운 빛. 그래서 Post Archive Faction 같은 브랜드는 서울의 느낌을 담고 있다. 절선, 기능성, 기술적인 정교함, 서울의 빛이 만들어 낸 미학이다.

도쿄도 기반은 분명 회색이지만, 그 속에 목조 건물과 낡은 목제 가구 처럼 오랜 물건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로부터 오는 고요한 따뜻함이 함께 있다. 차가운 콘크리트와 따뜻한 재질이 충돌하지 않고 공존하는 도시. 도쿄는 “정교한 혼란 속의 규칙”을 가진 곳이다. Comme des Garçons이나 Sacai 같은 브랜드는 이 감성을 정확히 반영한다. 혼란스러운데 단정하고, 실험적인데 고요하다.

도시의 색이 브랜드의 사고방식과 많이 닮아있다.

식생이 풍부하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햇빛, 해질녘 붉게 번지는 헤이즈—이 도시의 팔레트는 따뜻하고 유기적이다. 그래서 LA의 브랜드들은 자연광에 적응된, 느슨하고 감각적인 태도를 보인다. Stüssy와 Chrome Hearts는 트렌드보다 생활, 구조보다 감각, 완벽함보다 시간의 흔적을 선택한다. 흐트러져 있는게 오히려 자연스럽고, 햇빛과 바람에 바래서 더 아름답다.

그래서 나는 브랜드란 결국 그 도시의 색에서 태어난다고 생각을 했다. 우리가 어떤 브랜드에 무의식적으로 끌리는지는, 어쩌면 우리가 어떤 도시의 공기속에서 살고 싶은지와 연결 되는 부분이 아닐까.

CHAIR AND TIME
DEC. 2025

의자는 풍경을 장면으로 만드는 장치이다.

의자는 공간의 성격을 바꾸는 물건이다. 의자가 놓이지 않은 곳은 이동하는 공간, 지나가는 공간이다. 하지만 의자가 놓이는 순간, 그 자리는 멈출 수 있는 장소가 되고, 정적인 공간으로 전환된다.

의자는 인간과 직접적인 물리적 인터랙션이 일어나는 몇 안되는 가구이기도 하다 벽과 바닥, 천장처럼 크고 고정적인 요소들은 우리 인간에게 섬세한 상호작용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나 의자는 인간의 몸을 받아들이며 공간과의 관계를 구체적인 경험으로 변환한다.

의자에 앉는 순간, 풍경은 장면으로 바뀐다. 풍경은 지나가는 배경이고, 장면은 의식적으로 우리가 인식하는 공간이다. 의자에 몸을 내려놓는 행위가 시간을 느리게 만들고, 그 자리에서 흐르는 시간의 결까지 달라지게 한다. 의자는 그 자체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장치다.

지나가는 풍경 속에서 우리는 의자에 앉음으로써 비로소 ‘관찰자’가 된다. 움직임이 멈추는 순간, 그동안 인식하지 못했던 주변 세계가 열린다. 빛이 스며드는 방식, 공기의 흐름, 공간을 채우는 소리의 질감과 때로는 음악 — 이 모든 감각은 앉아 있을 때 더욱 체감되는 정보들이다.

의자가 놓인 공간은 머무르는 공간이 된다. 사람이 머무르면 이야기가 생기고, 이야기가 생기면 장소에 대한 기억을 가진다. 그 기억의 출발점에 의자가 있다.

의자는 단순한 가구가 아니라,시간을 디자인하고 장면을 시작시키는 오브젝트다.


RESONANCE
NOV. 2025

항상 왜? 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살던 나는 그동안 우리 세대 이전의 본인만의 세계관을 확립한 창작자들 — 그래픽 디자이너, 패션 디자이너, 예술가, 건축가들을 보며 어떤 작업물에서 내가 감동을 넘어선 ‘공명’을 느끼는지에 대해 고민해왔다.

형태 안의 온도, 여백 속의 리듬, 구조 안의 긴장. 그건 단순한 미적 취향이 아니라, 세상을 인식하는 그들과 나만의 방식이었다.

르 코르뷔지에는 건축을 인간의 삶을 조직하는 질서로 해석했고, 도널드 저드는 공간과 물질을 본질적인 아름다움으로 바라보길 원했다. 솔 르윗은 아이디어의 체계 안에 예술의 본질을 가두었고, 안도 다다오는 빛과 콘크리트로 영혼의 구조를 만들었다. 이들은 모두 논리와 구조로 감정을 다루는 사람들이었다.

이세이 미야케는 기술과 몸의 관계를 통해 따뜻한 질서를, 레이 카와쿠보는 인간의 불완전함 받아들이고 옷을 철학적인 조형물로 바라보았고, 버질 아블로와 니고는 기존의 문화적 질서를 재해석하며 시대의 감정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번역했다.

이들의 세계에서 ‘미(美)’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사유의 구조이자, 세상을 인식하는 하나의 언어였다.

나는 그 언어에 공명했다.

형태와 질서 속에서 감정을 느끼는 순간들 — 박서보의 반복, 디터 람스의 질서, 마시모 비넬리와 오틀 아이허의 정확함 속에서 흐르는 따뜻한 온도. 그건 차가운 기능미가 아니라, 감정의 구조였다.

아름다움은 소리치지 않아도 들리고, 감정은 표현되지 않아도 존재하며, 질서 속에서도 여전히 따뜻하게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JUDD
SEP.2025

도널드 저드의 가구는 매우 직관적이다.

마치 어린아이에게 의자를 그려달라고 부탁했을때 나올법한 그런 디자인의 의자들을 도널드 저드는 만들었다. 그의 의자는 모든 장식을 덜어내고, 어떤 감정도 어떤 해석도 요구하지 않은 마치 헬베티카 서체 같은 의자이다.

저드의 오브제는 솔직하다. 금속은 금속의 표면과 택스쳐, 날것 그대로를 보여주고, 나무는 나무의 결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는 재료가 가진 물성과 색을 아름답다고 느꼈던거 같다.

그런 정직함은 보는이로 하여금 특정한 감정이나 생각을 강요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오브제 자체를 ‘있는 그대로’ 마주하게 만든다.

저드에게 미니멀은 사물이 가진 본래의 성질이 가장 잘 드러나는 상태라 믿었기에, 불필요한걸 전부 제거 했을때 남는 가장 정확한 형태를 아름답다고 우리에게 제시했다.

그가 바라본 아름다움은 감동, 서사, 표현이 아니라 정확한 수치, 반복되는 질서, 재료의 물성, 형태의 정직한 존재 방식이였다.

저드의 작업은 박서보의 ‘Ecriture’와 김환기의 후기 점화와 같은 결의 감각을 품고 있다.

박서보의 반복되는 붓칠, 김환기의 점, 저드의 모듈은 다른 문화권과 시대이지만, 반복되는 구조를 통해 감정이 아닌 집중, 질서, 리듬을 보여준다. 그 표현 방식은 각자 다르지만, 반복 되는 작업 과정이 만들어 내는 고요한 아름다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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